분노 혹은 슬픔2007/05/28 19:51

극약처방은 그 효과만큼이나 위험성이 크기 때문에, 매우 제한적인 경우에만 허용될 수 있다. 민족주의란 극약처방의 대표적 속성을 가지는 [향정신성 관념] 중 하나이다.

우리에게 민족주의가 필요했던 것은 해방될 때까지가 아닐까. 그 이후로도 민족주의는 여러가지 극단적인 성취를 가능하게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와중에 수많은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켜, 차마 인간으로서는 저지를 수 없는 일들을 저지르게 하였다.

사실, 인간을 미치게 만드는 건, 민족주의 말고도 많다. 사랑, 돈, 명예욕, 권력욕, 종교.. 민족주의는 대략 종교와 동급에 놓을 수 있다. 그 맹목적적인 모습 뿐 아니라 절차와 목적의 전도됨을 비롯한 여러 속성이 서로 닮았다 할 수 있다.

얼마전 대한지적공사 지적재조사팀의 조병현 팀장이라는 사람이 네이버에 대형 떡밥을 던졌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백두산이 백두산이 아니고, 만주벌판에 있는 핑딩산이 백두산이라고. 그러면서 그 근거로 대동여지도 서문을 들었다. 당연히 난리가 났다. 일제가 개시키라는 둥, 짱깨들이 역사를 왜곡한다는 둥, 나라가 힘이 없어서 영토를 빼앗기고도 병신같이 군다는 둥...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조팀장은 만선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얼핏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가 항상 보았던, 한반도가 그려진 대동여지도가 그 대동여지도가 아니란 말인가? 그럼 그간에 우리가 본 것은 무엇인가?
이런 아주 기초적인 질문이 머릿속에 당연히 떠오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몇 가지 찾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몇몇 사람들이 그 글에 대해 즉각적 반론을 게재하였다.

초록불 : 백두산 - 핑딩산 론의 허구 입증 
banti : 백두산이 사실 다른곳이라고?

그런데, 댓글들이 가관이다. 황구라의 난 때에도 등장했던 논리가 이번에도 등장했는데, '주변 나라들은 다 역사왜곡 하는데, 우리도 좀 하면 안되냐?' 라는 논리.

민족이라는 강력한 뽕 앞에 이성이 무너지고 판단력이 마비되는 현장을 또다시 목도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영향력은 황구라의 난만큼 강력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아수라장을 불과 2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또 볼 수 있다는 것은 일견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무엇이 이들의 이성을 이토록 마비시켰을까?
혹은, 세상이 너무 각박하여 더이상 이성으로 판단하는 것이 너무나 피곤한 게 되어버렸을까? 어차피 이성적으로 돌아가는 세상이 아니니까?


Posted by Glorid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