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시사저널 지지 - 성역은 존재해서는 안된다.

생각 혹은 고민 2007/06/28 01:14
사실, 특별히 시사저널에 특별한 애정을 가졌다거나 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학교 다니던 시절에 버스에 올라타면서 사들었던 잡지는 시사저널이 아닌 한겨레 21이었다. 시사저널은 가끔 누군가를 통해 보곤 했지만, 당시만 해도 한겨레에 적잖은 애정 (어떤 의미에서는 의무감 - 현재는 별로 없는)을 가지고 있었기에, 항상 다만 주머니에 돈 몇 천원이 있다면 한겨레21을 집어들곤 했다.

물론 시사저널 기사의 품질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나름 훌륭한 기사들에 즐거워하며 '한겨레는 일단 좀 꺼려진다는 사람들에게 권할 훌륭한 대안' 으로 주변에 가끔 추천하곤 했다.

그런데 기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단다. 그 끈적끈적한 구조를 자랑하던 대한민국의 거대 언론사 기자들(심지어는 이제 막 단물을 보기 시작한 신참 언론사까지도)이 악다구니를 쓰며 국민의 알 권리를 빙자해 기자실 철폐 반대를 외칠 때, 그들은 진짜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서 길거리에서 싸워야 했다.

아닌 것을 아닌 것으로 말하기 위해서 감내해야 할 고통은 얼마나 많은가. 그것은 거의 예외없이 상상을 초월하는 압박을 수반한다. 책임져야 할 이들이 없는 사람에게도 그러한 압박은 끔찍하다. 하물며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입장에서는 어떠하랴.

특히 말하고자 하는 것이 삼성이라면,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싸움에 가깝다. 회사 직원들을 동원해서 법원 주차장을 메워버리는 만행도 서슴지 않는 그들이 아니던가. 아니, 그러한 정도의 만행은 오히려 소소한 애교로 생각해줄 수 있다. 이제 삼성은 그야말로 '법 위의 존재'가 되어버렸다. 삼성은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면 길들여지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삼성에 대한 개인적인 호불호가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다. 호도 있고, 불호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원칙에 관한 문제이다. 성역은 반드시 그 스스로 사회의 암세포가 된다. 성역은 그 자체로 원칙보다는 손익이 이 사회의 가치관임을 웅변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치관 속에 있는 사회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개개인이 행복할 수는 없다. 정신과 가치관의 빈 자리에 물질을 들어 붓는다고 인생이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아니, 성역이 존재하는 사회는 그 자체로 물질조차도 모든 개개인에게 자비롭지 않다. 시사저널 사태는 그 자체로 우리 사회의 자본권력이 얼마나 통제되지 않는 존재인지를 나타내는 시금석이다.
 
세상 모든 일에는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특별히 사명감과 더불에 바른 가치관을 가져야 하는 일들이 있다. 그중 으뜸에 속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언론일것이다. 언론이 부패할 때 풍기는 악취는 다른 일반 회사 하나가 불법을 저지를 때 풍기는 악취와는 차원이 다르다. 사람들의 머릿속을 오염시키고, 세상을 능히 아수라 지옥으로도 만들 수 있다. 과장이 아니다. 현대 미디어의 모든 선전 선동 기법들은 괴벨스로부터 출발한다는 것만 보아도 그 파장의 심대함을 알 수 있다.

모두가 입에 재갈을 물린 채, 찬미가만 우렁차게 들려온다. 꽃가루가 사방에 흩뿌려진다. 위대하신 말씀이 선포되고, 모든 입들은 그것을 다시 받아 외치기에 급급하다. 대체 휴전선 너머의 김씨 왕조와 무엇이 다른가? 오히려 이에 대한 비판은 그 성역의 피해자들 속에서 스스로 검열되고, 자정(!)당한다.

사실 이렇게 등 뒤가 무너지는 일은 싸움을 더욱 힘들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사저널 기자들은 굴하지 않았고, 이제 투쟁 1년만에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고 한다.시사저널 사태가 원만히 해결되지 않음이 마음 아프지만, 한편으로는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 두 적과 싸워야 하는 괴로움이 있다면 차라리 깨끗하게 갈라서는 게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끝까지 싸워준 그 분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싶다.

그리고, 재벌권력의 강아지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금창태 사장이 훌륭한 언론 하나를 날려버린 그 댓가로 무엇을 얻는지, 그리고 역사 속에서 어떻게 기억되는지 두고두고 지켜보고 싶다.

그리고, 새로운 시사저널 창간을 후원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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